2021.04.15 (목)
전후세대가 분단된 조국의 참혹했던 현대사를 제데로 알수없었던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이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극우반공 이데올로기 교육을 받고 성장했기에 독립운동세력을 절대다수가 지지했던 당시의 상황과는 달리 빨갱이 놀음에 편승해 오면서 선거 때가 되면 온갖 부정술책을 다 부려도 독재세력에 투표하는 비율도 꽤나 높았다.
세월은 흘러도 과거사의 진실은 완전히 숨길수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내용은 깊이 은폐 되었고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으나 깊이 묻힌 진실을 밝히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고 점점 더 잊혀져 온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지독히도 접근을 거부해왔던 나머지 부모형제의 억울한 죽엄조차도 입밖에 내놓을수가 없어던 시절이 반세기넘도록 반공법의 적용으로 입만벙긋해도 감옥살이를 해야 했던것이다. 그런 시기중에서도 4,19학생혁명으로 해외로 도망간 이승만 시대가 마감하게되자 1960년 전국의 유족들이 각지역에서 유족회를 결성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해방 후 제4대 국회에서 전국의 관공서를 통해 희생자들의 신고를 받아 발표한 희생된 사람의 숫자가 114만 여명 이었다. 이 숫자는 사건 후 10년 정도 경과된 시기였기에 학자들의 견해도 비교적 정확한 수치로 받아들여 졌다. 천명 단위 조차도 밝혀내기 어려웠던 전국적인 대규모의 집단학살극이 진행되었던 해방정국과 전쟁 시기의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학살은 전세계적으로도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동족이 동족에 대한 반인륜적 만행 이었 던 것이다.
(2편에서 계속)
계좌번호 복사하기